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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20060725~0802 터키 & 그리스 가족 여행

20060730-1_트로이 (5) - 트로이 유적지 (1)

드디어 트로이 유적지 입구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가이드 말이 트로이는 아직 할 이야기가 없다고 했다.





아빠도 함께 기념촬영을...


말로만 듣던 트로이 목마의 전면 모습


트로이는 19세기 말에 하인리히 쉴라이만이라고 하는 독일인이 발굴한 기원전 3,300년 경의 미케네 문명의 유적지이다.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의 소재가 되는 유적.


쉴라이만은 영국의 프랭크 캘버트라는 학자의 주장을 믿고 트로이 유적지를 오스만 터키의 황제에게 간청하였다.


당시 오스만 터키의 황제는 무슬림 유적지가 아닌 미케네 문명을 발굴한다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어 발굴을 허락하였다.


1871년 현재의 터키 동북쪽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히사르릭 구릉에서 트로이 유적 발굴에 성공한 일약 엄청난 학자로 급부상하였는데,


실상으로 그는 돈이 될만한 유적은 모조리 베를린 박물관으로 빼돌려버리고 겉껍데기 만을 터키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터키의 입장에서 본다면 쉴라이만은 희대의 사기꾼이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 것이 19세기 유럽의 문명인으로 자처하는 유럽인들의 본모습이다.


트로이에서 발굴된 참 모습을 보려면 여기가 아닌 베를린 박물관으로 가야 한다고 하니....


기원전 3,300년에 이루어진 미케네 문명은 이와같은 토기가 그 주류를 이루게 된다.


그 오랜 옛날에 이와같은 성채를 쌓았다니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아직도 발굴은 계속 진행중이다.


사실 이 발굴이 의미하는 바는, 유럽인의 정신적인 고향은 그리스/로마 이지만, 그 그리스/로마의 유적 중 로마 유적의 일부만이 이탈리아에 있고
그리스 유적은 19세기 당시에는 그리스가 터키의 영토였으므로 거의 모든 유적지가 오스만 터키의 영토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유럽인의 정신적 고향을 찾는 일에 불과하지만, 현대를 지배하는 것은 유럽(유태인)의 돈이며, 유태인이 겉으로는 백인을 지지하다 보니 이런 것에 훨씬 많은 예산을 투입하게 되는 불합리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인류사의 일부를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 역사를 찾아내는 일에 불평등함이 내재되어 찝찝하기 이를 데 없다.


트로이 유적지나 에페소 유적지 복원의 십분지 일만 청동기 유적지 발굴에 투입해도 선사시대 터키 역사를 밝히는 데 더 도움이 될 것같다.


내가 근무하던 터키의 수도 앙카라 에서 삼순이라고 하는 항구로 가는 길목의 멀지않은 곳에 청동기 유적지가 있다.
그 발굴은 이미 종료된 듯하지만 발굴된 내용은 아직 부족한 듯이 보인다.


쉴라이만 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면, 내가 어릴 적 소년잡지에 게재된 쉴라이만의 이야기를 읽고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동경한 적이 있었다.  자그마치 7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다니....  
그러나, 알고보면 네덜란드에서 자라난 쉴라이만에게는 비슷비슷한 언어구조를 가진 7개국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행한 짓이 유적을 도둑질해서 빼돌리는 짓이라니...
그런 인물이 위인으로 존경받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실망감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며, 이런 것이 바로 서구 열강들이 자행해온 짓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유적지 성벽에서 살짝 포즈를 취한 마눌님...


막내도 슬쩍 끼어들었다.  현지인 가이드의 모습도 보인다.










이 발굴된 모습을 보면 잉카의 마추픽추나 고구려 성곽의 모습에 비하면 너무나도 엉성하기 이를 데 없다.


물론, 시대가 청동기 시대였다는 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굳이 목마를 이용해서 트로이 군대의 눈을 속이고 잠입해야 겨우 함락시킬 수 있을 정도의 성채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 BC 3,300년 경의 유럽의 유일한 문명국가였다고 할 수 있는 그리스의 군사력이 이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잉카제국의 미추팍츄가 그 연대가 훨씬 뒤이기는 하지만, 잉카문명이 발견되었을 무렵의 그들의 생활상을 본다면 결코 미추팍츄가 트로이 유적지보다 뒤에 건설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문명의 시작점이 그리스에 비해 훨씬 늦었을 뿐이다.  그 이유는 발달한 이웃 문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건너왔던 베링해라고 하는 돌아갈 수 없는 바다가 문명의 수입을 가로막아버린 것이다.


저 멀리 바다가 보인다.
여기가 바로 트로이 전쟁이 벌어진 땅인 것이다.


얼마 안되는 좁은 땅인데, 이 땅에서 전쟁을 벌여봐야 몇 천명 단위였을 것이다.


한 번 전쟁을 벌이면 백만대군을 동원하는 중국의 규모와는 비교할래야 할 수도 없는 ...


이 성채는 단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위에서 본 트로이 유적 단면별 연대표에 보면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쌓이고 쌓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수만 군사를 이끌고 상(商)나라를 즉 은(殷)나라를 정벌한 주 무왕은 그 시대가 비슷하지만, 규모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발굴이 진행중인 곳이다.


텐트에 가려있고, 미공개지역이다.


가만히 보면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쌓은 성임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 돌로 성벽을 쌓은 것은 상상하기 쉽지 않으리라.


그 시대에 중국에서는 돌로 성벽을 쌓았으니 문명의 동/서 비교는 정말 무의미할 정도이다.


그들이 자랑하는 그리스/로마 문명이란 것이 겨우 이런 수준이었다.


나는 트로이 유적지를 보면서 삼만리를 횡횡하면서 드넓은 초원을 누볐던 우리 선조가 중국이란 황하 유역의 봉토를 하사받고 왕으로 등극하면 동쪽을 향해 제사를 올리던 중국 은나라 시절의 풍습을 떠올리면서 우리 선조의 높은 기상을 오늘날에 되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절, 대왕은 북서쪽으로 군사를 보내어 멀리 바이칼 호 지역까지를 영향권내에 넣었다.
고구려가 고조선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부여국을 흡수하여 강대해지기는 하였지만, 인근의 강성한 토호를 다스리지 않으면 중국과의 전쟁에 있어 어려움이 많은 것을 미리 내다본 광개토대왕의 혜안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고조선이라는 고대의 국가가 청동기 기반의 단순한 농업국가가 아니라 북방 일대를 지배하던 거대한 유목민 국가였음을 여기 와서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 고조선을 향해 황제가 되면 태산에 올라서 봉선제를 올려야 했던 것이 중국의 실상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