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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20060725~0802 터키 & 그리스 가족 여행

20060729-1_셀주크 (1) - 셀주크 가는 길과 피혁공장 패션쇼 (1)


이제 파묵깔레를 두고 떠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셀주크로 출발하는 아침이다.

셀주크...

어디서 꽤 들어본 이름이다.


돌궐의 족장 셀주크가 서진한 이래 그 손자 투그릴 베그가 1035년에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속하는 호라산을 빼앗아 독립한 다음 1055년에는 바그다드를 점령하여 술탄이 되었다.  그의 조카 아르슬란이 2대 술탄이 되어 파티마 왕조로부터 시리아 북부를 점령한 다음 비잔틴 제국을 격파하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를 사로잡는다.
이 바람에 동로마제국은 아시아를 모두 잃어버리고 유럽지역에 국한되어 힘이 크게 축소되었고, 나중에 오스만 터키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당하고 동로마 제국이 망하게 되는 원인을 배태하게 된다.


그 셀주크 터키의 왕성이 있던 곳이 바로 셀주크으로서 위에서 보다시피 셀주크 투르크의 시조가 되는 셀주크의 이름을 딴 도시가 바로 셀주크이다.


그러나, 셀주크 터키는 왕자들의 패권 싸움으로 55년만에 망하게 되고 이 시기에는 십자군으로 부터 역공을 당하게 되는 시기이다.


그러나, 수/당 두 왕조와의 오랜 전쟁으로 전쟁 수행 능력이 높아진 돌궐족이 지휘하는 이슬람 제국의 저항은 거세기 이를 데 없어 십자군 원정은 거의 다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셀주크 터키가 멸망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몽고족에 있다.  이슬람의 대 왕조는 징기스칸의 아들이 이끄는 몽고군에게 패퇴하여 일한국의 한 속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돌궐족의 한 가문인 오스만 가문은 아나톨리아 반도의 서북부에 자리잡고 부족장 오스만 1세가 주변의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영주들을 점차 정복해 나가면서  1326년에즉위한 오스만의 아들 오르한 1세가 동로마 제국의 부르사 지방을 점령하여 일한국의 속령에서 벗어나 오스만 국후국을 만들고, 1346년에는 동로마 황제 오한네스 6세 칸타쿠제누스와 동맹을 맺어 마르마스 해와 다다넬스 해협을 넘어 유럽에 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오르한1세의 아들 무라트 1세는 아드리아노폴리스 (지금의 에디르네)를 점ㄹㅇ하여 이 곳을 제2의 수도로 삼고 상비포병군 예니체리를 창설하는 등 본격적인 제후국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1939년에 코소보 전투에서 세르비아 왕국등 발칸 제후국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그 아들 바예지드 1세는 1936년에 헝가리 왕국을 필두로한 십자군을 격파하고 영토를 더 확장하였으나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패한 후 왕자들의 난으로 인해 제국의 확대가 일시적으로 멈추었다.


그의 아들 메흐메트 1세는 1421년에 제국 재통합을 이루고 국력을 회복하였으며, 그 아들 무라트 2세는 십자군을 물리치고, 다시 무라트 2세의 아들 메흐메트 2세는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는 데 성공하여 드디어는 동로마제국을 멸망으로 이끌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수도를 이 곳으로 천도한 후 성 소피아 성당을 아야 소피아 사원으로 개조하여 모스크로 만들었으며, 어느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이란 아랍식 이름으로 서서히 바뀌어지게 되었다.
이스탄불은 이-스탄-불 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더라.
여기서 불 이란 의미는 우리나라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의 벌과 같은 의미로 영토 혹은 땅 이란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이런 의미로 우리나라와의 가느다란 공통점이 있던 돌궐의 후예인 오스만 제국은 15세기 말 발칸과 아나톨리아 지방의 거의 모든 땅을 차지하였고, 흑해와 에게해를 오스만의 내해로 만들었으며, 1512년 셀림1세는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메카와 메디나의 보호권마저 장악한다.  드디어 이슬람 세계의 맹주가 되고, 아바스 왕조로부터 칼리프라는 칭호를 양보받아 술탄이자 칼리프를 겸임하게 되어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루었다.



10대 군주인 쉴레이만 1세는 발칸반도와 북아프리카까지 확장시켜 베오그라드를 정복하여 헝가리를, 성요한기단이란 이름의 해적단을 내쫓아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1526년에는 모하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서 헝가리를 정복하였으며, 동으로 사파비 왕조를 공격하여 바그다드를 손에 넣고 예멘까지 진출하여 아덴을 정복하였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맺고 1529년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비엔나를 1개월동안 포위하였다.  비록 이 포위는 빈 전투에서 패배하여 서진이 멈추는 계기가 되었지만 1538년 프레베자 해전에서 스페인과 베네치아 공화국을 위시한 기독교 세계의 연합함대를 격파하고 지중해의 거의 대부분을 손에 넣어 육상 뿐만이 아니라 해상에서 조차도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국가가 되었다.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함대가 기독교 연합제국의 함대에 패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상실하기는 했으나 1753년 키프로스를, 1574년에는 튀니스를 획득하였고, 1683년까지 슬로베니아와 아드리아해 연안을 제외한 모든 발칸반도 지역을 지배하였다.


이후 오스만 터키는 점차 쇠락의 길을 걸어가게 되어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점차 국토가 줄어들고, 그 배경에는 강력한 국가로 발돋음한 러시아가 있었다.
1800년대 말, 많은 총독들이 독립하여 국가를 만들어버리고, 제1차 발칸전쟁으로 알바니아가 독립한 이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주축국의 일원으로 참전해 패배한 이후 소아시아와 유럽의 일부만을 지니게 되었다.


독립한 그리스마저 영국과 연합군을 이루어 터키를 침공하자 멸망의 위기에 처했으며, 1922년 케말 파샤가 앙카라로 연합군을 유인하여 대파하고 이스탄불에서 또 다시 대승을 거두어 그리스 영토의 일부를 다시 회복하게 되었으나 1922년 메흐메트 6세가 폐위되면서 오스만 제국은 공식적으로 그 600년 역사의 종지부를 찍고 로잔 조약에 의해 오늘날의 터키 영토로 확정된 터키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히유...
터키의 역사를 위키백과에서 찾아 옮기다시피 적어보았다.


하나, 이 것만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스페인이나 포르투칼 등 당시 서구 열강의 대표적인 강국이 왜 서쪽으로 남쪽으로 옮겨다니면서 인도로 가는 길을 찾아다녔는가에 촛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에는 서유럽은 이슬람의 공세를 극도로 두려워 하였다.
빈에서 간신히 서진을 저지하기는 했으나 서구의 열강들에게는 오스만 제국은 아니 이슬람 제국은 상대할 수 없는 엄청난 강국이었기에 감히 붙어서 싸울 엄두를 내지도 못하고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 서쪽으로 항진하다 보니 아메리카를 발견하였고, 남쪽으로 빙 돌아가 희망봉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바스코다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예멘에 이르러 자신의 대 선단을 추장에게 자랑하자 추장이 피식 웃으면서 수십년 전에 왔던 명나라의 대선단은 너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크고 강력했다라고 답해 바스코다마가가 우물안 개구리임을 깨닫게 해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즉, 서구 열강이라고 하는 떨거지들은 강력한 나라인 오스만 제국에게는 덤벼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서쪽이나 남쪽으로 가서 문명이 훨씬 뒤떨어진 인디언을 학살하고 흑인을 노예로 잡아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실로 인류사에 있어서 상종하기 싫은 저열한 민족이라는 의미다.


대부분의 강대국은 자신보다 강하다고 평가받는 상대와 싸워 이겼기에 자신들이 노획한 것을 정당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 반면, 서구 열강이란 것들은 정말 상대도 안되는 문명이 낮은 나라를 상대로 비열한 속임수까지 써가면서 거의 멸종에 이르게 하는 저급한 인종이다.


이 것이 그들이 자랑하는 서구 열강의 실체이다.
그 배후에는 막강한 금력을 가진 유태인이 버티고 있었다.


지금도 유태인의 자금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이 것을 완전히 떨쳐 내어야 진정한 인류사의 회복이 이루어 질 것이다.


각설하고...
셀죽으로 가는 중간에 가이드 양반, 또 다시 판촉 활동에 들어간다.


중간에 어떤 가죽공장에 들러 일행을 다 내려놓고 패션쇼를 벌인다.










어두운데다 역광이라 촛점맞은 부분의 명도가 낮아서 흔들리고 있다.










셔속이 모델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한다.
실내인데 패션쇼 하는 중이라 스트로보를 쓰지 못했기에...


























이게 웬 거북이????









이 것으로 그친 게 아니다.
다음 회를 지켜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