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가 어땠길래 인간고수들이 당황했을까
(한게임바둑=한창규 기자) "불현듯 나타나서 홀연히 사라졌다." 지난해 12월 29일부터 올해 1월 4일까지 인터넷 바둑 세상을 들쑤셔 놓았던 '최신판 알파고'가 그랬다.
일주일간의 짧은 기간 동안 인공지능 알파고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인간 고수와 선별 대국으로 총 60판을 해치웠다. 지치지도 않고 휴식도 필요 없는 기계에게 하루 10판은 식은 죽 먹기와 다를 바 없었다.
전적은 놀랍게도 60승0패. 퍼펙트 스코어를 기록했다. 인간 세상의 고수들은 알파고의 실력에 놀라워했고 연전연패에 곤란스러워 했다. 그리고 알파고의 '참신한' 수들에 어리둥절했다.
업그레이드 되어 나타난 알파고가 대체 어떤 수를 두었길래, 기존의 바둑 질서를 무너뜨렸다는 수들이 어떠했길래 인간 고수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까. 알파고의 수 또는 수법을 그 깊이를 떠나 흥미 위주로 골라 보았다.
"알파고가 정석을 바꾼다?"
<그림1> 원성진(흑) vs 알파고 |
우하귀는 화점에 날일자로 걸침해 왔을 때 흔히 볼 수 있는 한칸협공 정석. 흑9까지는 기본형 코스인데 A에 잇지 않은 백10이 익숙지 않다.
이처럼 2선에 둔 수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기보로도 확인하기 힘들 만큼 오래 전의 일이다. '돌의 능률'을 중시하는 알파고는 감정(?)에 치우치지 않은 합리적인 수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 사라졌던 수가 다시 등장한 게 신선하다.
<그림2> 알파고(흑) vs 김지석 |
우상귀 흑1 협공으로부터 정석 진행에 돌입. 이하 7까지는 책에 나와 있는 코스인데 백8ㆍ10으로 쿡쿡 찔러가고 12ㆍ14로 한점을 끊어잡는 수가 바둑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을 때 흔히 범하는 하책(?) 같다.
17까지가 알파고에 의해 탄생한 일명 '알파고 정석'. 귀에 15집가량을 선수로 취하고 18로 세력을 견제했다. 18이 흑의 벽에 가깝게 다가선 느낌이 들지만 오히려 약점을 노리겠다는 발상이 아닌가 싶다. 이 절충이 백에게 득이라면 흑7로 뛰어받는 정석은 추억 속으로 사라져야 할지도 모른다.
"알파고가 두면 악수 아니다?"
<그림3> 알파고(흑) vs 박영훈 |
백1로 바짝 압박해 왔을 때 흑4ㆍ6을 두지 않아도 우하귀의 흑은 끄떡없다. 그럼에도 알파고는 서슴없다. 그 사이 백은 5ㆍ7이라는 철벽이 만들어졌으니 인간의 눈엔 흑이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아 보인다. 이를 테면 '속수' 또는 '이적행위'라는 것인데….
벽을 만들어주고 나서 태연히 8로 들어가는 알파고이다. 이 부분에 대해 대국 당사자 박영훈 9단은 "금기시했던 수인데 우리에게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런 수들이 알파고 바둑에서 너무 많고, 또 이런 수로 이겨간다"며 "그렇다고 막연히 따라 둘 수는 없고 뜻을 알고 두어야 하는데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림4> 알파고(흑) vs 탄샤오 |
흑6, 백7의 교환도 프로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분명 이 두 수의 교환 자체로만 보면 손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알파고는 그 이후의 진행까지 그려두었던 걸까. 8ㆍ10의 공격을 생각하고….
그림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그 후의 과정을 보면 흑6과 백7의 교환이 득이겠구나 하는 느낌을 준다. 이 시점에서 좌하귀 맛을 감소시키는 눈앞의 마이너스보다 앞으로 하변 싸움을 예상해서 이득인 교환이라고 판단했다면 인간의 영역을 멀찌감치 벗어난 것이리라.
"알파고 주특기는 어깨짚기?"
<그림5> 알파고(흑) vs 이세돌 |
이세돌-알파고의 대국에서 화제를 모은 수 중의 하나가 '5선의 어깨짚음'이다. 기존의 상식으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흑6이 5000년 동양문화의 정수인 바둑의 패러다임을 바꾸려 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했다.
<그림6> 알파고(흑) vs 리친청 |
업그레이드된 알파고에선 마치 주특기라도 되는양 어깨짚는 수가 자주 등장했다. 흑5가 일례. 기리로 본다면 △ 한점이 약하기 때문에 A로 두칸벌림 겸 육박하는 것이 '무난한' 수였다. 신기한 것은 그 후 백의 수들에 이상이 없어 보이는 데에도 얼마 가지 않아 이미 백의 형세가 나빠졌다는 것. 땅을 칠 노릇이다.
"알파고는 3ㆍ三을 좋아해?"
<그림7> 알파고(흑) vs 김정현 |
또 하나 자주 보인 수가 3ㆍ三칩입이다. 귀의 실리를 차지하는 3ㆍ三침입은 포석 단계에선 웬만해서 잘 등장하지 않는 수법. 집으로 얻는 것보다 더 큰 세력을 허용해서 균형을 잃기 십상이기 때문에서다.
흑1로 하나 걸쳐놓고 서둘러 귀를 파고든 흑3. 감정도 없고 표정도 없으니 천연덕스럽다고 해야 할까. 프로기사 사이에선 논쟁거리가 된 수였다. 너른 자리가 많은데 귀의 실리를 탐(?)했으니 납득 불가일 수밖에. 당사자 김정현 6단은 "막상 만만치 않아서 당황했다"는 감상을 밝혔다.
<그림8> 알파고(흑) vs 구쯔하오 |
우하귀 흑1의 3ㆍ三. 선수로 귀의 실리를 취하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하변 백 진영을 유유히 깨러 갔다. 이하의 진행은 백의 두터움은 다소 중복인 모습이고 흑은 좌변과 호응한 모습이 활발하다.
"알파고도 실수를 한다?"
<그림9> 알파고(흑) vs 커제 |
백1ㆍ3 선수 이득 활용에 알파고의 흑4가 눈을 의심케 했다. 살아야 하는 것은 맞는데 흑4는 자기 집을 줄인 수인 것. 이미 △들을 잡아놓은 마당에 흑4로 둘 게 아니라 A로 사는 편이 집으로 득이니까(이런 점은 있다. A는 팻감을 당할 수 있는 반면 4는 팻감을 원천봉쇄하고 있다는 것. 이미 집으로는 이겼으므로 그 점까지 고려했을까).
그렇다면 흑4는 알파고의 버그일까. 이번 승부에서 알파고는 20집도 넘게 이긴 바둑을 끝내기에서 큰 곳을 놓아두고 작은 곳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는데 차이가 좁혀졌을 뿐 결과는 반집승이 됐든 불계승이 됐든 전부 이겼다는 것. 혹자는 "100% 이긴 바둑에선 상대가 가장 약 오르는 수를 둔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알파고도 변심한다?"
<그림10> 알파고 vs 알파고 |
알파고와 알파고의 대국보. 알파고 공식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이런 장면에서 백1로 붙여가는 수가 일반적이라고 해설해 놓았다. 그런데 이것이 이번 대결에서 바뀌었다.
<그림11> 천야오예(흑) vs 알파고 |
천야오예 9단과 둘 때엔 똑같은 장면에서 백1로 들어갔다. 앞서 4의 곳을 붙여가는 게 '정답'이다 했던 마음을 바꾼 것이다. 이세돌이 알파고에 유일하게 이겼던 챌린지대결 제4국 '신의 한수'를 당시의 알파고는 응수를 그르쳤지만 현재의 알파고는 그 장면에서 당연히 다르게 받는다고 하니 알파고의 진화라 해야겠다.
<그림12> 박정환(흑) vs 알파고 |
마지막 그림은 박정환 9단과의 바둑. 같은 형태에서 알파고는 천야오예 때처럼 이번에도 △의 곳을 선택했다. 백1 붙임에 박정환은 2쪽으로 변화를 구했고 이하 복잡한 전투로 번져갔다. 이 바둑은 270수에서 끝나 박정환이 1집반을 졌다.
최신판 알파고와 대결을 벌였거나 기보로 접한 프로들은 "제 아무리 알파고가 두었다고 해도 수긍할 수 없다"는 견해도 피력했다. 한편으로는 "대체 언제부터 나빠졌는지 잘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한다.
박영훈 9단은 "상대의 실력이 강하면 모르는 사이에 불리해질 수 있다"고 하고, 김지석 9단은 "인간처럼 두면서도 기본적으로 바둑 자체가 세다"고 잘라 말한다.
인간 고수들은 '우주류'로 맞서 보기도 했고 '흉내바둑'도 시도해 보았지만 알파고의 승리엔 변함 없었다. 채 50수를 두지 않았는 데에도 그 이후엔 기회가 없었다고 진단한 바둑도 적지 않았다.
알파고에 3패를 당하고 위염이 심해져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던 커제 9단은 "반 년 넘게 알파고의 무엇이 강한지를 연구했지만 인간은 인공지능의 가장자리에도 못 미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나는 이미 늦었지만 여러분은 바둑을 새로 배워야 할 것 같다"는 구리 9단의 말도 전해졌다.
"정상급 프로기사들은 기술적인 면에서 한계치에 다다른 느낌도 없지 않았는데 알파고를 통해 새로운 세계로의 탐험이 가능해졌다"는 안성준 7단의 말처럼 인간의 바둑이 다음 단계로 발전하기 위해선 그동안의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야야 한다는 시각이 팽배하다.
더이상 인간 대 알파고의 대결은 무의미한 것일까. 제한시간을 늘리고 인간 고수 여러 명이 의논해서 두는 상담바둑이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하지만 어쩌면 해보지 않은 방법에 대한 막연한 기대심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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